6·25
한국전쟁(韓國戰爭)
Korean War

동족 상잔(同族相殘)의 비극(悲劇)

6·25 한국전쟁이 전개된 날짜순으로 주요 격전지들 가운데
기념탑이라도 세워져 있어 방문할수 있고 추모할수 있는곳들을 모아 봅니다.

첫번째 페이지로
전쟁 발발시 부터 서울이 수복되기까지의 격전 현장들 입니다.

전쟁발발


1950년 6월 25일 새벽 4시.
북한은 옹진 · 개성 · 동두천 · 춘천 · 인악(仁岳) 등지의 육로와,
동해바다를 통해 삼척(三陟) · 임원진(臨院津) 등지에 상륙하며
38선 접경지 전역에 걸친 일제공격을 시작한다.

춘천지구 전투 6.25 ~ 6.30

사진출처 : 국방정신전력원 블로그

전쟁발발 직전 춘천지구에 주둔해 있던 국군 제6사단 7연대에
인민군이 귀순해와 "전차 40대와 많은 병력들이 화천해 도착해 있다는" 정보를 얻게되고
30여명의 수색대를 잠입시켜 귀순병의 진술을 확인한 연대장은 사단장에게 보고와 함께 사태에 대한 대비를 갖추기 시작했다.

6월25일 7연대에 기습 포격이 시작되고
초반 열세를 보이며 후퇴를 하던 국군은 전력을 재정비 하여
이날 정오쯤 옥산포를 지난 보리밭에서 반격을 시작하여 인민군을 서원방면으로 후퇴하게 만든다.
또한, 소양강 도하를 한번 실패한뒤 오후 6시쯤 다시 도하를 시도하는 인민군을 선제공격으로 격파한다.

27일 또다시 인민군의 총공격이 시작되고
춘천 시내부터 뚫리기 시작하며 적의 추가병력이 증원됨에 따라 결국 국군은 밀려나게 된다.

강릉 전투 6.25 ~ 6.28

사진출처 : 전쟁기념관 홈페이지

국군 제8사단이
육전대 및 비정규전부대로 증강된 인민군 제5사단의 수륙 양면에 걸친 협공을 당한 긴박한 상황 하에서
3일 동안이나 강릉을 지탱한 방어 전투이다.

04시 본격적인 전투개시에 앞서 이미 인민군은 정동진 해변마을인 등명동에 나타나 주민들을 강제동원하여 탄약과 보급품을 운반시키고 뒷산 중턱에 개인호를 파놓고 경계태새를 취하고 있었다.
포격소리와 함께 인민군 제5사단은 7번도로 축선을 따라 남하를 시작하고 주문진에 상륙한 북한 육전대는 강릉을 목표로 북상을 시작한다.

05시 30분경 전면전의 상황을 파악한 국군 8사단장은

1. 모든 군수품은 대관령 너머 진부리(珍富里)로 소산시킨다.
2. 6월 25일 10시를 기하여 작전지역 내에 계엄령을 선포한다.
3. 군경가족과 공공기관을 후방으로 피난 및 소개 시킨다.
4. 민간 차량을 징발하여 기동력을 확보한다.

위와같은 비상령을 발령하고
강릉 학도호국단 산하 1400여 명의 학생이 자발적으로 참여하며 탄약 및 보급품의 운반과 환자 구호와 연락업무를 수행하였는데 이것이 학도병 참전의 효시가 되었다.

강릉 사천면 덕실리에 당시 육군 제18포병대대의 전공을 기념하는 강릉지구 포병전공비가 세워져 있다.

옥계 전투 6.25

사진출처 : 전쟁기념관 홈페이지

05시경 묵호경비부의 옥계해안초소로부터 인민군의 상륙을 보고받은 YMS-509정은
정박해있던 묵호항에서 서둘러 출발하여 북상하였다.
짙은 안개속에서 마주친 인민군 선박과의 해상 전투를 벌여 적 수송선 한척 격퇴, 상륙정 한정 격파, 상륙정 한정을 포획한다.
망상 해변에 옥계지구 전적비가 세워져 있다.

의정부지구 전투 6.26

사진출처 : 의정부시 홈페이지

인민군은 전쟁 개시와 함께 철원-연천-의정부를 거쳐 서울을 조기 점령하려는 계획에 따라
동두천, 포천지역을 집중 공격하기 시작한다.
급작스런 공격에 피해를 입고 흩어진 국군은 의정부에서 다시 집결하고
대전에 있던 제2사단의 1개대대 지원병력이 도착하여 다음날(26일) 반격과 방어에 나섰으나
장비적 열세에 있던 국군은 전차를 앞세운 인민군에 뚫리고 만다.

내촌 태릉 전투 6.26

사진출처 : NAVER 지식백과

인민군이 포천을 점령하여 대한민국의 수도 서울의 북동쪽이 뚫리게 되자
한국군 육군본부는 육사 생도대대까지도 포천과 태릉 지역에 투입하라는 명령을 하달하게 된다.

당시 육군사관학교에는 1년 과정을 마치고 20일 뒤인 7월 14일 임관할 예정인 생도 1기 262명과
4년제 정규 대학 과정으로 6월 1일 입교한 생도 2기 334명이 교육받고 있었다.
대부분 외출,외박중이었던 생도들은 급하게 복귀한 1기생 전원과 2기생 중 277명 등 539명으로 생도대대를 편성하고
학교에 근무하는 장교에게 지휘를 맡겨 출동하도록 했다.
이들이 북한의 전차와 맞서야 했던 무기는 박격포와 경기관총, 자동소총이 전부였다.
대부분 M1소총으로 무장했다. 박격포탄은 50여 발, 실탄은 1인당 56발에 불과했다.

6월27일 새벽 4시


25일 북한군의 남침이 시작된 그날 저녁
대통령 이승만은 주한 미대사를 만나 서울을 빠져나가야겠다는 뜻을 전하지만
미대사는 너무이른 결정이라고 만류한다.
국회에서는 서울사수와 철수 문제를 놓고 밤샘토론이 이어졌고 찬반투표를 통해 서울사수를 결정지었다.
26일 결과를 보고하기 위해 국회대표가 경무대를 방문하였으나
대통령 이승만은 이미 없었다.

국회와 논의도 없이 빠져나와 27일 새벽 4시에 서울을 탈출, 낮 12시 30분 대구에 도착한 대통령 이승만은
너무 멀리왔다는 주변인의 조언에 다시 대전으로 올라간다.
대전에 도착한 시간은 오후 4시 30분

27일 저녁
국민들은 안심하고 제자리를 지키라는 이승만 대통령의 육성녹음이 방송되고
28일 새벽 2시 30분
피난민으로 가득차 있던 한강 인도교 철교가 아무런 예고도 없이 국군에 의해 폭파된다.

이로서 민간인은 물론 후퇴하던 국군들도 퇴로가 없어 밀려오는 인민군을 그대로 맞닥뜨려야만 했다.

조선인민군의 서울점령 6.28

사진출처 : 우리역사넷

6월 28일 새벽 인민군의 탱크가 서울 중심부에 들어온다.
그러나, 바로 한강을 도하하지 않고 7월 3일까지 서울에 머무른다.
그 이유에 대하여,
첫째, 춘천전투의 패전으로 인한 전력보충의 시간이 필요했다는 분석.
둘째, 인민군의 목표는 초기 서울점령 및 단독정부 수립 이었으나 이승만정권의 신속한 탈출로 인해 전력 재정비후 추격전으로 이어지게 되었다는 분석.
셋째, 남로당 책임자인 박헌영이 전쟁 발발시 20만 명의 남로당원의 일제 봉기로 대한민국 자체가 조기 붕괴되도록 하겠다고 호언 장담하며 이를 기다리자고 주장 하였다는 분석.
이와 같은 세가지 견해가 있으며,
많은 학자들 사이에서는 첫번째 춘천전투의 패전을 이유로 보고 있다.

미국의 한국전쟁 참전


서울이 함락되자 미국은 한국전쟁에 적극 개입하기로 결정하고
7월1일 부산에 미군 선발대(스미스 부대)가 도착한다.
스미스 부대는 신속히 대전을 방어하기 위해 이동했으며
7월2일 본대가 부산에 도착한다.

오산 죽미령 전투 7.5

사진출처 : 위키백과_오산 전투에서의 바주카팀

7월3일 인민군은 한강을 넘어 남하하기 시작하고
스미스 부대는 대전으로 들어오는 인민군을 막기위해 평택과 안성에 진을 구축하고 있었다.
7월5일 오산 북쪽 죽미령에서 인민군과 스미스 부대는 교전을 벌이게 된다.

이곳에서의 첫 전투에서
예상치 못한 인민군 전차부대의 전력에 스미스 부대는 뚫리게 되고
540명의 부대원 중에서 150명이 전사하고, 포병대대 소속 장교 5명과 병 26명이 실종되었다.

UN군의 첫 격전지인 이곳 죽미령에 "유엔군 초전기념관"이 세워져 있다.

천안(개미고개) 전투 7.7 ~ 7.9

사진출처 : 국가보훈처

7월2일 선발대의 뒤를이어 곧바로 들어왔던 미8군 제24사단은
스미스부대를 돌파하고 파죽지세로 밀고 내려오는 인민군을 막기위해
이곳 개미고개에서 진지를 구축하고 인민군과 맞서게 된다.

4일간의 전투에서 428명의 미군이 목숨을 잃고 결국 후퇴하게 되었으나
이들의 희생으로 인민군의 남하속도를 지연시키면서
국군에게는 부대 재편성의 시간과
유엔군에게는 새롭게 군을 투입할 시간을 확보할 수 있게 되었다.

군산-장항-이리 전투 7.16 ~ 7.19

사진출처 : 디지털군산문화대전 홈페이지

한국전쟁 발발후 한국 해병대가 최초로 참가한 전투로,
천안을 점령하고 있던 북한군 6사단 13연대가 호남지역을 장악하기 위해 남하하기 시작하자
군산, 장항지역으로 진출하는 적을 방어하기 위해 해병대가 서해안을 우회 상륙하여 전투가 벌어지고
한국 해병 최초의 전투이자 최초의 승전을 얻어낸다.
인민군 사상자 356명, 포로 5명을 확보하나 68명의 해병이 전사하였다.

바다가 내려다 보이는 군산 월명공원 정상에 전적비가 세워져 있다.

화령장 전투 7.17 ~ 7.25

사진출처 : 전쟁기념관 홈페이지

인민군 제 15사단이 화령장-상주 축선으로 공격을 한다는 첩보를 입수한 육군은 급히 국군 제 17독립연대에게 방어 임무를 부여하였고
이에 제 17연대는 화령장 일대에서 매복하며 기다리고 있다가 계곡으로 남하중인 북한군 제 15사단을 기습 공격하여 적 주력 2개 연대를 격멸하였다.

부산 교두보 전투
8.4 ~ 9.18


사진출처 : 위키백과

유엔군은 조선인민군의 지속적인 진공에 계속 패퇴하면서 낙동강 방어선까지 물러났는데,
이 방어선은 1950년 7월부터 8월까지에 걸쳐 한반도 남쪽에 구축된 140km의 방어선이었다.
미군이 반격을 준비하며 후퇴하는 동안 인민군을 최대한 방어하고
부산항을 통해 병력과 보급물자를 보충 받을 수 있는 최후의 보루인 것이다.

가능한 모든 병력을 끌어모아 방어선에 집결시키는 과정에서 호남지역의 병력을 대부분 착출하여 호남을 방치하는 결과가 되었으며
정읍-장성-광주지구 전투중 보급품과 병력지원 요청을 국방부장관이 직접 묵살하며
"육탄으로 용감하게 싸우시오!"라는 명언을 남기기도 하였다.

부산을 지키기 위한 주요 전투는 대구, 마산, 포항, 낙동강 일대에서 벌어졌으며
조선인민군의 대공세가 2차례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유엔군의 성공적인 방어로 인하여 북한군은 병력에 큰 손실을 보게 된다.

다부동 전투 8.3 ~ 9.22

사진출처 : 위키백과

한국전쟁 당시 가장 치열했던 전투로
8월1일부터 시작된 전투는 9월24일까지 55일간 벌어졌으며
인민군 5천6백여명, 국군과 미군이 약 3천5백여명이 전사했다.

정상의 주인이 15번 바뀐 328고지 전투와
가장 많은 희생자가 난 837고지 전투 등으로
다부동전투는 최대 격전으로 평가된다.
그 덕분에 국군과 유엔군은 대구와 부산 등 낙동강을 중심으로 한 방어선을 지킬 수 있었고,
북진의 계기를 마련할 수 있었다.

통영 전투 8.17 ~ 8.19

사진출처 : 인터넷

통영 전투(統營 戰鬪), 통영상륙작전이라고 불리는 이 전투는
북한군이 점령하고 있는 통영반도에 대한민국 해병대가 상륙작전을 감행하여 탈환한 작전이다.

미국 '뉴욕해럴드 트리븐' 기자 '마가렛 하킨스'는
우세한 적군을 공격해서 적의 점령지를 탈환한 예는 일찍이 없었다는 사실을 높이 평가하고,
한국해병의 전투력을 두고 "귀신이라도 잡겠다"는 기사를 보도함으로써
'귀신 잡는 해병대'라는 호칭의 시작이 되었다.

영천 전투 9.2 ~ 9.12

사진출처 :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홈페이지

국군과 조선인민군이 벌인 낙동강 전선 마지막 대전투로
처음에는 영천이 함락되어 최악의 상황에 이르렀으나 반격을 하여 영천을 탈환하고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어 전세를 역전시켰다.

장사 상륙작전 9.15

사진출처 : 인터넷_학도병

UN군 사령관 더글러스 맥아더의 주도로 인천 상륙작전이 기획되고
인천 상륙에 앞서 북한군을 교란시키기 위해 삼척, 군산 등지에 포격을 가한다.
일명 양동작전, 성동격서 라는 전술을 펼치는 가운데
마지막 작전으로 동해 영덕의 장사리에 상륙작전을 펼친다.

학도병으로 구성된 772명이 문산호를 타고 장사에 상륙하여 국도 제7호선을 봉쇄하고 조선인민군의 보급로를 차단하는 데 성공한 작전이다.
그러나 작전 성공후 퇴로가 막혀 탈출하지 못하고
139명이 전사하고 92명이 부상을 입었으며,
참가한 학도병들은 사망이 확인된 학도병을 제외하고는 모두 행방불명 상태이다.

인천 상륙작전 9.15

사진출처 : 위키백과

7만 5천여 명의 병력과 261척의 해군 함정이 투입되었다.
2주 후 유엔군은 서울을 점령하게 된다.

서울 수복
9.18 ~ 9.28


사진출처 : 인터넷

인천상륙작전 직후 9월 18일부터 28일까지 한국해병대, 국군 제17연대, 미 제1해병사단, 그리고 미 제7사단이
연희동 방면, 마포 방면, 남산 방면 등 3개 방면에서 서울로 진출하여 시가전을 치른 끝에
9월 28일 서울을 완전 탈환하였다.

신리-김포 전투 9.18 ~ 9.21

사진출처 : 전쟁기념관 홈페이지

인천에 상륙한 한미 해병대는, 미 해병대가 동쪽 외곽에 설정된 교두보로 진격하는 동안
한국 해병대는 인천 시내에서 남아있는 잔적 섬멸작전을 진행한다.
인천지역의 교두보를 확보한 미 해병대는 서울을 향해 진격해 나아갔고
한국 해병대는 적의 공격을 막아내면서 김포반도의 적을 섬멸해 나갔다.

연희고지 전투 9.20 ~ 9.24

사진출처 : 대한민국역사박물관 홈페이지

인천에 상륙한 한미 해병대는
시흥,안양,수원을 차례로 점령하고 진격하면서 연희고지에 도달하게 된다.
이곳은 서울 진입을 막을수 있는 인민군의 최후의 요새였기에
인천 상륙작전의 성공과 실패는 이곳에서의 전투에 달려 있었다.
미해병대는 105고지로 한국해병대는 104고지(연희고지)로 진격한다.
한국 해병대 최대의 전사자를 만들어낸 이곳에서의 격렬한 전투를 결국 승리하여
서울 수복의 발판이 되었다.
1개 대대의 병력과 추가 보충병력이 투입되었던 이 전투에서 살아남은 해병은 26명 이었다.

서울 중앙청 입성
9.28


사진출처 : 인터넷

6·25전쟁 70주년 사업추진위원회 에서
기념서체 '62570체'를 발표, 공개 하였습니다.
서체 폰트파일은 위원회 홈페이지 또는 네이버 폰트에서 내려 받으실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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